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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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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2-03-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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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에 독일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따라 암울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에 피로사회가 땡겼다. 얇지만 어려운 책, 그리고 많은 것을 공감하고, 또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1. 신경성 폭력

 

21세기를 전후로 폭력의 양상이 바뀐다. 21세기 이전에는 면역학적 폭력이 이루어졌다. 흔히 "안돼"라는 부정성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우리 몸에 바이러스 같은것이 침투하게 되면 저항하듯이, 우리 자아에 부정성이라는 것이 들어오면 자아가 박살나기 때문에백신과 같이 일부의 부정성을  통해 그러한 위협을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이질성을 싫어하고, 큰 폭력에 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작은 폭력을 용인하게 된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긍정의 과잉성 폭력이 나타나게 된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생산성이 중요하게 되었다. 과거처럼 부정을 통한 폭력으로는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래서 "해보자, 된다, 할 수 있어"라는 긍정의 방법이 사용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이 과잉상태에 빠짐으로 인해서 폭력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과잉으로 인해서 '박탈당하기 보다는 포화되고 배제하기 보다는 고갈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시스템을 침투하는 바이러스와는 달리 긍정의 과잉에 따른 폭력은 시스템 자체에서 발생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21세기를 들어서면서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규율사회에서 인간은 복종의 주체였다. ' ~해야한다'는 부정성의 사회였고 이러한 사회에서는 광인과 범죄자가 나타났다. 반면 성과사회에서는 '할수있다'는 탈부정성사회이고 이러한 사회에서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가 나타났다.

긍정의 과잉상태에 아무런 대책없이 내던져진 인간은 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신을 착취하게 된다. 또한 우울증 환자는 성과주체가 더이상 무엇인가 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지배기구가 있었고 자유가 박탈 당했다. 반면 성과사회에서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로써 성과극대화를 위해서 자유로운 강제에 자신의 몸을 맡김으로인해 자기 착취에 빠지게 된다.

 

3. 깊은 심심함

 

긍정의 과잉은 자극과 정보, 충동의 과잉에 영향을 받았다. 지각이 파편화 되고 분산화 되었다. 우리가 '멀티테스킹'이 중요하고 말한다. 하지만 멀티테스킹은 오히려 진화가 아닌 퇴화라고 한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신경써야 하는 수렵자유구역의 동물과 유사할 뿐이다. 여러가지를 신경씀으로 인해서 대상에 대한 사색의 시간이 줄어들게 되고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생존에 대한 관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인류가 이룩한 문화적 업적이란 깊은 사색의 주의에 대한 결과다. 빠른 정보처리, 산만한 주의는 창조의 과정에서 중요한 깊은 심심함 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문명은 평온이 결핍한 야만상태이다. 인류에서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게 평가 받은 시대는 없었다. 관조적인 면을 대대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5. 보는 법의 교육

그렇다면 이렇게 긍정이 과잉성으로 비롯된 폭력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안은 사색이다.

'모든 충돌을 그대로 따르는 천박성은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사색적인 삶은 자극에 대한 저항으로 주체적으로 조종하는 것을 말한다. 충동에 대해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과잉활동적 해소로 행동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환하기 위해서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하다. 전반적인 활동과잉과 가속화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한 총체적 의문을 제기 하게 한다. 활동과잉과 가속화는 넓은 시가적 지평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를 통해서 현재속에서 중단하고 멈춰서야 한다.  

 

세계가 긍정화 되어가면서 모든 예외상태를 흡수해가버렸다.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 시켜버렸다. 인간은 그저 계산기와 같은 기계로 변질 시켜버렸다.

긍정성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힘이라면 부정성은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다. 무력함과는 다른 의미이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이 없다면 치명적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게 된다.

 

 

 

 

??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 시기에 왜 나는 이렇게 고독하고 병드는 가? 라는 고민을 한번쯤 해 본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열정을 가지면 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는데, 나는 더 힘들어진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한 것 같다.

 긍정이 좋다고 해서 맹목적인 긍정을 쫒으면 안 된다.  

그 저 못된 사람이 바보를 이용해서 옳지 옳지 잘한다 칭찬하면서 더 이용해 먹는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우리 사회라는 큰 시스템 속에서 나는 저 바보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네, 알겠습니다. 해보도록 하겠습니다."가 당연한 것인지 알았고 그렇게 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시 멈춰서서 대상에 대한 사색을 하고, 옳지 않은 일에 "안됩니다. 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라고 부정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문제에 대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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